공지사항


- 경소설회랑에서 칼럼 연재합니다. -ㅁ-



http://litale.co.kr/faeryrover


컨택 관련이나 안부 등의 잡담은 여기에 덧글로 달아주세요.
현재 망할 놈의 위장병때문에 입원하고 검진받고 뭐하고 해서 칼럼도 기획도 가다서다를 반복인데, 곧 괜찮아진답니다. -_-;

멋대로 쓰는 장르문학 이론

 

그냥 시간이 남는 김에 잠깐 써본다.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으니 대충 쓰고 넘어가는 스케치로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길 바람. 사실 담긴 내용들이 허벌나게 어려운 내용도 있기 때문에 그냥 관심있는 사람은 한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임.

그냥 완죤 내 맘대로 쓰는것이기 때문에 언제 글을 내릴지는 며느리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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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이랑 문단문학이랑 뭐 어떻게 구분하는거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장르문학 vs 문단문학은 엄밀하게 말하여 소설을 정치/사회적으로 구분하는 도식이 될 수 없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순수문학의 반대는 참여문학이다. 대중문학이 결코 아니다. 순수참여논쟁이 일어난 시기에 역사적 정황을 본다면 이건 거의 명백하다. 그래서 요새는 ‘문단문학’과 ‘장르문학’ 혹은 대중문학으로 구분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럼 SF문학과 문단문학(혹은 순수문학)이 구분될까? 어림없는 소리다. 필립 K 딕의 작품들은 이걸 일거에 바보놀음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영문학 비평가들이 이 작품땜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탈리아사람인 에코가 ‘하이퍼리얼리티’라는 단어로 한방에 정리한 것은 유명한 일화)

판타지? 장르판타지라고 말하는 일군의 소설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장르판타지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타트롤>은 또 어떻게 할건가? 프리드리히 푸케의 <물의 요정 운디네>는? 장르판타지를 순수문학이나 정통문학쪽에서 따로 분리해버리면 중세 서사시와 유럽 문예사조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낭만주의 소설은 죄다 빠져버리게 된다. 호러? E.T.A 호프만과 테오필 고티에는 호구인가?

쉽게 말해서 소설이 ‘소설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준근거중 하나는 루카치가 잘 닦아놓은 ‘내적형식’을 탐구해보는 것이다. 소설(특히 연재형식의 장편소설)의 기원을 ‘총체성 상실로 인해 잉태된 문제적 자아의 모험’으로 간주하는 이것을 우리는 ‘근대소설’이라는 멋들어진 용어로 정리하고 있다. 근대소설의 내적형식은 우리가 아는 문학의, 특히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리얼리티’, ‘플롯’, ‘캐릭터’, ‘성찰과 반영’(이건 물론 엥겔스의 주장이긴 하지만) 등등등....

그리고 문단문학이라고 불리는 종의 것들은 여전히 이 ‘근대소설’의 이디엄을 쫓는다. 물론 근대소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당대의 하나의 흐름이었으며, 훌륭한 예술의 감동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드립을 치면서 찬사한 작가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벌써 130년 작가다. 130년동안 그럼 소설은 여전히 근대소설에 안주하고 있었을까? 절대 아니올시다이다. 근대소설을 개박살 내면서 유럽 소설을 바보로 만든 흐름이 바로 저 유명한 중남미 마술적 사실주의인데, 마술적 사실주의의 내적형식을 이야기하려면 지면이 끝도없이 늘어날테니, 일단 그런 게 있다는 선에서 마무리 짓도록 한다.

요는 문단문학에서 쫓는 내적형식이 분명하게 ‘근대소설의 그것’을 쫓아간다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과 ‘구조적 치밀함’, 그리고 ‘수사학’, ‘성찰과 반영’의 밀도를 보는 이러한 문학상 및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것들은 모두 문단문학이 근대문학을 쫓아간다는 것이다. 뭐, 요새야 외국의 내로라하는 현대소설들이 속속 번역되다보니 아직까지 리얼리즘을 부여잡고 있는 문단문학이 드디어 GG를 치고, 최근의 탈리얼리즘적 행보에 발을 맞춰 작가들을 선별하는 것을 보면 이제 좀 뭔가 바뀌고 있는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어쨌든, 그렇게 따지면, 드디어 장르문학의 반대가 윤곽이 드러난다. 장르문학, 혹은 장르소설의 여집합은 바로 ‘문단문학’이 아니라 ‘근대소설’이다. 참고로 루카치가 말한 근대소설은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거고, 그러므로 당연히 19세기까지의 낭만주의 소설은 빠진다. 그래서 낭만주의 소설은 ‘노벨레’라고 부르고, 리얼리즘소설부터는 ‘로만’이라고 나누어 부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생긴다. 문단문학에서 주로 다루는 근대소설의 내적형식이 루카치와 그 이후 네오막시즘 계열의 이론가들에 의해 어느정도 정립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장르소설의 내적형식은 과연 존재하는가?

나의 대답은 ‘물론 존재한다’다. 우선 판타지소설로 보자면, 우리의 히어로 존 로날드 류얼 톨킨의 <On Fairy Stories>(내가 칼럼쓸때 줄기차게 인용하던 바로 그것. 판타스틱에서 Tree&Leaf를 번역해주면서 이 글을 빼먹었다는 데서 판타스틱이 얼마나 장르에 대해 무지몽매한 집단이었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에는 톨킨이 추구하는 장르판타지의 내적 형식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다 담겨있다. 이타카 홈피에 가면, 내가 이 부분에 대해 대충 적어놓은 칼럼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라고. (또 쓰긴 심히 귀찮음.) 요는 판타지소설의 내적 형식은 ‘내재적 리얼리티’라고 하여 사물에 끼인 리얼리즘의 진부한 시야를 벗어던지게 하는 마력이다. (그래서 On Fairy Stories에서 톨킨은 ‘판타지를 읽는 건 마법에 걸리는 것Enchanted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건 매우 주목할만한 일인데, 이 ’마법에 걸리는 것‘이라는 의미는 노발리스가 말한 ’마성적 관념론‘과 거의 비슷한 개념이다. 이로써 우리는 장르판타지의 기원이 동화와 겹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미학에 그 원류가 있다고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SF는 말할 필요가 없다. SF는 근대소설이 ‘플롯’을 쓰듯이 ‘외삽’이라는 아주 훌륭한 에피스테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과학의 인식을 근간으로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상상하는 자아의 모험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SF책들에서 밥먹듯이 나오지만, 이것이 ‘구조적 특징’일 뿐만이 아니라 ‘내적형식’에 포함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를 이야기하려면 SF소설의 기원과 탄생부터 거슬러 올라가야하는데, 15세기에 독일 마이스터들에 의해 창작된 ‘파우스트 노벨레’를 SF로 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긴 한데,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니깐 여기선 생략.

호러? 호러의 아버지를 E.A 포우로 보지만, 호러라는 것이 가지는 hidden horror라는 관념은 이미 신화시대의 누멘Numen(관심있는 분은 엘리아데의 <성과속>을 읽으시길)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공포는 후기낭만주의로 가면서 ‘자아의 망각’과 연관되면서 발전된다. 토도로프가 호러소설을 구조주의의 구문론적 분법으로 분석한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호러의 내적형식도 낭만주의, 그것도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집중조명한 후기낭만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역사적 궤에 맞물려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단문학’에 밀려있다고 말하는 장르소설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근대소설과 다른 내적구조, 다른 역사적 발전단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이와 관련된 번역서도 없을뿐더러, 연구하는 분들도 극히 드문데다가 각 학과마다 퍼져있기 때문에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문학전공자들이라면 알아야한다. 근대소설도 하나의 ‘내적 형식’에 불과하다. 근대소설만이 소설인가? 그것만이 서사문학의 진수인가? 그러면 중세서사시는 어쩔건데? 아도르노가 말한것처럼 고등학교때까지 지겹도록 배운다는, ‘전체주의를 개인속으로 수혈하려한’ 아이헨도르프 소설은?

물론 나는 라노베의 내적형식도 어느정도 연구가 끝난 상태이지만, 굳이 그걸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지 싶다. 그건 나같은 쪼렙 학부졸업생이 할 일이 아니라, 진짜 대학원에서 머리 부여잡고 씨름하는 전공자들이 해야할 몫이니깐. 난 이제 졸업한 전공자이지, 학자는 아니다.

암튼 기나긴 잡담은 여기까지.


육체와 정신에 대한 복음서 - 카잔차키스, <조르바> 포스트모던소설




1. 보헤미안적 정신, 철학을 만나다.
이 소설은 아시다시피 자전적 소설입니다. 카잔차키스가 만난 조르바라는 실제 인물에 대한 소설이며,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환상적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정신에 대한 소설이면서도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두가지 상반되는 소재를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학가인 주인공과 조르바는 어찌보면 전혀 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도 학자와 노동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어렵고 그 두 위치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물론, 카잔차키스는 철학가도 아니었고, 사상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소설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했듯이, 카잔차키스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저 자신의 삶의 일부를 소설로서 ‘보여줄 뿐'이죠. 하지만, 이것을 읽으며 저는 문학이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제 문학론을 더욱 확고히 해줄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사상서를 불문하는 방법론을 ’뛰어넘는‘ 통찰력으로 삶에서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고,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늘 생각해오던 문제, 정신과 육체의 간극 (이 친구가 마법이나 오컬트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 역시 육체의 세계에서 영적인 문제들이 어떤 관련이 있었는가를 연구하는 방편 중 하나였던것 같습니다.)과 둘의 조화에 대한 문제가 이 소설만큼 훌륭하게 보여지는 소설도 없기에, 그 친구는 이 책을 자신의 삶의 한 가운데에 두었던 소설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사상과 신념등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아, 이녀석이 이 소설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친구가 천착하는 삶의 문제와 조르바의 이야기는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바로 “육체와 정신의 소통방법”이었던것 같습니다.


2. 육체와 정신, 그 우연적 만남
이 소설은 정신으로 대표되는 카잔차키스와 육체로 상정하는 조르바의 만남이 가져오는 변증적 상승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둘은 언뜻 보기에 극과 극이며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시작부터 그런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중요한 삶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조르바와 카잔치키스가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순간. 그것은 첫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이기까지한 새벽 바다의 포효를 서로 바라봄으로써입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이 작품의 특질이 보여집니다. 평생을 책만 탐독해오던 학자나, 평생 떠돌며 몸(육체)의 삶을 실천한 부랑자나, 인간인 한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자연의 포효와 감동. 그것을 서로 응시하는 순간, 서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든, 어떠한 삶을 살든, 절대자와 삶의 중요한 비밀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되고,(이 부분 때문에 카잔차키스를 연구할 때 베르그송이 언급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표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닮은꼴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항구의 까페에서 왜,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접근하였을까요? 많은 독자들은 이것을 그저 ‘우연’이라든지, 조르바가 ‘얻어먹을것이 있어서‘ 접근한게 아닐까 라고 생각할겁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두 인물의 만남은 표면적으로 그러한 우연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창작 기법에서 ’우연적 필연‘이라는, 윤대녕 아저씨가 잘 쓰는 이 기법은 정신을 꿰뚫어보는 심미안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둘은 모두 새벽의 항구에 나간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뱃사람들처럼 바다를 응시합니다. 하지만, 그런 성난 바다와 잠잠한 평화를 서로 응시하는 순간, 조르바는(물론 조르바는 이런 모습들에 익숙해 있고 능숙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이런 경이의 광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을 목격합니다. 즉, 이런 자연의 위대한 순간 속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삶을 직관하게 되는 또 다른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인물이 바로 카잔차키스입니다. 카잔차키스가 까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잠기던 상념과 거기서 추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가히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에 의한 지속‘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는 삶의 편린들을 추출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는것을 ’직관‘합니다. 이것은 조르바가 카잔치키스에게 접근할때부터 일종의 ’확신감‘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인물은 전혀 다른 곳에서 (한 명은 삶 그 자체에서, 다른 한 명은 베르그송에 기반한 내적 자아의 주체의 지속에 의해서) 출발한 인물이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한 점은 같다는것을 조르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

환상적사실주의 일러스트와 조우하다 - 까미유 주르디, <아델과 유령선장> 그래픽노블


1.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노블
대개의 그래픽노블은 만화가들에 의해서 창작되어왔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그래픽노블이 가지고있는 '리얼리티'와 '그림'의 만남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예술분야가 바로 만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래픽노블이 만화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데이브 맥킨의 활동영역을 보아도 이미 만화가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고, 반대로  아마노 요시타카 같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닐 게이먼과 훌륭한 작업물을 내놓지 않았던가. 일러스트레이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림의 상징적이고 시적인 - 사실대로 말하자면 다소 모호한 - 이미지에 명확한 언어를 부여해줄 수 있는 그래픽과 서사텍스트의 결합은 사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제법 이상적이었던 방식이었고, 문학 분야에서는 이것이 '그림책'과 중세의 '이콘'들에 상당수 산재해있었다.


2. 소설을 그리다
까미유 주르디는 프로파일에 나와있는 대로, 만화전공자가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자이다. 따라서 그녀가 그리는 그림들은 만화의 특성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가지고 있는 캐리커쳐적인 면이 부각되며, 대사보다는 서사에 비중을 두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다수의 그래픽노블이 만화적 형식에 충실하게 소설을 써나가는 데에 반하여(닐 게이먼은 좀 많이 예외라고 하더라도), 까미유 주르디는 그림책의 배치에서 '공간'이라는 그래픽디자인적인 미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디자인 언어로 서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만화의 '칸'이 삭제되면서 동시에 그림 배치의 형식이 일정부분 정해져있는 그림책과도 거리를 둔 채,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성을 매우 적절하게 활용한 편집방식으로 텍스트와 그림을 배치해나간다. 거기서 도출되는 방식은 그림책과 만화와 소설 삽화의 방식, 심지어 만평에나 사용될법한 전면일러스트레이션 + 아포리즘의 방식으로 이야기의 극적 성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 일상 속의 환상, 환상속의 환상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장르독자들에게 매우 친숙하다. <아델과 유령선장>에는 흔해빠진 직업을 가지고 권태에 찌든 두 명의 어른이 등장한다. 그리고 흔해빠지기 싫은 소녀아이 안나와 흔해빠졌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유령 선조 이반 베르뗑이 등장한다. 그리고 권태에 찌든 두 어른, 소설가와 아델의 '허구적 창작'은 페이지 앞뒤를 교차하면서 비로소 소설의 내러티브가 드러난다. 이야기속의 이야기, 허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창조한 환상적 인물 - 괴물들간의 자연스러운 교차는 전형적인 중남미풍 환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환상적 리얼리즘이다. 기법적으로 보자면, 이 작품에서는 그래픽디자인적인 '여백의 면'을 십분 활용하여 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이 창조한 가상의 인문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이 극적인 효과는 이 작품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빛을 발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이 언어보다 좀 더 모호하다고 위에서 말했던가. 일러스트레이션의 그 모호함은 돌려말하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어 소설보다 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말이 된다. 소설보다 일러스트레이션이 환상풍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그림의 매력을 소설로 끌고 들어온 독특한 작품이 바로 <아델과 유령선장>이다. 이작품의 편집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재구성은 분명 기존의 출판시장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낯설정도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환경인 것이다.


4. 진부한 소시민의 소소한 환상
이 작품은 소시민이 가지는 일탈적 몽상을 - 탈주가 아닌 - 일탈로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신선한 맛을 가지게 만든다. 이 작품의 효용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을 집어든 우리도 영락없는 아델이고, 영락없는 비인기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가치들이 하나의 텍스트(혹은 삶)안에서 어떤 굉장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아델과 유령선장>은 보여준다. 이 작품의 플롯을 분석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까미유 주르디는 이 작품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림책도, 그렇다고 만화도 아닌, 현대에 아주아주 친숙한 소설의 리얼리티중 하나인 환상적 리얼리즘의 플롯을 전형적으로 끌어와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을 읽는 데에 있어서 좀 더 두드러지는 측면은 바로 '환상적 사실주의의 메타포들이 심상이 아니라 일러스트로 어떻게 구현이 되느냐'인데, 그녀는 만화와 그림책의 틀을 깨버리고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재편집된 소설을 '디자인'하므로써 그러한 문제점을 간단히 해결해버렸다.

 


이글루스 가든 - 리뷰를 씁시다.(애니&만화책&소설)

영웅과 광인 사이 - 앨런무어, <킬링조크> 그래픽노블


  1. 앨런 무어와 그래픽노블
  앨런 무어는 몇몇 인터뷰에서 그래픽노블은 허구라고 주장한 적 있다. 그에 따르면 그래픽노블이란 그저 코믹북 몇권을 묶어서 고급스럽게 팔아먹기 위한 상업적 마케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픽노블이 '소설적 측면'이라는 성격에 따라서 붙여진 용어라는 점을 감안하기 이전에, 앨런 무어가 만화를 그리는 스타일에 대해서 먼저 따지고 볼 필요가 있다. 앨런 무어의 모든 작품은 한가지 커다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적 미장센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사실 만화의 구도와 컷 구성 자체가 영화에서 빚진 것이 상당 부분 많은 만치, 사실 어떻게 보자면 앨런 무어의 미학적 특징은 초기 만화의 그것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앨런 무어의 작품이 '그래픽노블의 시초'라고 평가 받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다. 구도는 영화적 미장센에 충실히 따라가고 있더라도, 대사가 그래픽과 가지는 긴장관계는 일반적인 영화미학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2. 앨런 무어의 '그래픽노블'
  그렇다면 앨런 무어의 작품은 왜 '그래픽노블적'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영화는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서사뿐만이 아니라 대사와 미장센, 사운드, 인물이 빚어내는 종합적 성격에 따라 테마가 도출된다. 따라서 비주얼만큼의 여러 요소들이 영화의 서사를 떠받치는 구심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 '스토리(주의하라! 플롯이 아니다!)'는 단선적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시간이라는 벽에 묶여 있기 때문에 몽타주를 통한 묘사에서 문학적 제스처를 취하기 아주 어렵다. (물론 빅토르 에리세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감독들은 제외지만)
  바로 이 비어있는 '문학적 제스처'의 틈에 앨런 무어의 만화가 가지고 있는 '대사들'이 박혀있다. 닐 게이먼이 문장과 대사간의 배분과 그래픽 사이의 융합을 통해서 한 컷 안에서 명징한 서사를 구축하려 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앨런 무어의 만화 대사들은 좀더 어쿠스틱한 나레이션에 가까워서, 대사와 그래픽스와의 긴밀성이 상당히 너르다. 이 효과로 말미암아 장면 미장센과 대사가 가진 서사의 진행을 교차시키므로써 극적 긴장을 만들고, 빈번한 플래시백을 사용으로 플롯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앨런 무어의 만화는 시퀀스를 통째로 스케치해야 서사를 인지할 수 있고, 그만큼 함축적인 미장센을 구축하며, 생각보다 복잡한 기법을 사용해서 서사의 전체적인 묘사를 완성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만화'의 범주를 능가할 수 있는 '문학적 제스처'의 대사의 깊이로 말미암아 감히 '노블'이라고 부를만한 위치에 까지 올라서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조만간 올릴 그의 대작 <프롬헬>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물론 앨런 무어는 아마도 이것이 만화예술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3. 배트맨 : 킬링조크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련의 리바이벌 무브먼트, 그러니까 닐 게이먼의 <샌드맨>이나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같은 작품들은 일련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카툰계에서 진부할정도로 낡아빠진 영웅들의 아이덴티티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앨런 무어의 <킬링조크>역시 위의 두 작품과 더불어 그러한 리바이벌 무브먼트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내가 신뢰하는 한 친구의 조언에 의하면 미국 카툰, 특히 수퍼히어로물을 읽을 때 가장 중심에 둬야할 질문은 단 한가지다. 그것은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카툰에서 초인적 힘을 가진 주인공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신의를 지키려 노력하면서 악을 물리치는 전형적 선악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건 미셸 푸코와 뉴에이지가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1970년대 이후의 문화적 움직임과 함께다. 그리고 이 거대한 뉴웨이브는 1980년대에 이르러 수퍼히어로물의 본질 자체를 뒤집어 흔든다. 그것이 바로 '누가 정의냐?'라는 엄청나게 포스트모던한 질문이다. <킬링조크>는 이 점에서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동질성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추적하고 있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4. 광기와 정의 사이
  위에서 미셸 푸코를 들먹인 이유가 있다. 앨런 무어는 그 단단한 고증과 작가적 사유를 통과하지 않은 캐릭터는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킬링 조크>의 조커는 이런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기반한 논리를 가지고 프로이트적인 외상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방대한 지식과 해박한 통찰력을 가진 앨런 무어라면 이 두 인문학자의 이론을 조커에 심어넣는 사유를 무리없이 수행했을 거라고 본다. (실제로 <프롬헬>의 많은 부분에서 칼 융과 프로이트의 이론이 눈에 띄기도 하듯이) 이 작품의 핵심은 이런 타자화된 광기가 어떻게 악당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가다. 이 짧은 작품에서 이런 조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기법으로 플래시백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배트맨의 과거를 어느정도 알고 있음으로 해서 조커와 배트맨의 내면에 대한 비교와 가늠이 가능해지고, 작품은 서사를 일관적 속도로 진행시키므로써 - 이 역시 앨런 무어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컷 배분은 영화적 균등성을 획득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 두 자아가 충돌하는 모습을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일견 조커의 대사와 행동들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무질서적'이며, 그의 말이 궤변에 가까울 정도로 진실에 닿아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가 바라보는 오컬트관과 비슷하게 1980년대식의 포스트모더니티가 캐릭터에 전가된 모습이지만) 하지만, 앨런 무어는 바로 마지막 순간에 짤막한 조크를 통해서 20세기를 풍미한 미국 펄프 코믹북에서 진부하도록 제기한 '정의'와 '악의'의 분할이 종이처럼 얇은 단 하나의 '신념'으로 인해서 갈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정의와 광기를 구분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리얼리즘 텍스트라면 이 대답이 사실상 무의미하겠지만, 이것은 히어로물. 고전적 대답에 대한 반동적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와 영웅의 동질성을 부각시키면서 독자를 혼란시키다가도, 끝내 그 결정적 차이와 결정적 공통점을 한번에 보여준다. 이작품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5. 통찰력 있는 작가의 서스펜스한 액션 그래픽노블
  독자들이 <킬링조크>를 읽어가면서 가지는 동정심과 혼란스러움은 앨런 무어의 투철한 작가적 사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영화적 미장센, 특유의 서사교차를 통해 파국에 이르러 거대한 하나의 메세지로 뭉쳐진다. 정의와 광기가 실낱처럼 가로지르는 그 단 하나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앨런 무어는 작품의 시작부터 바로 이 질문을 가지고 카메라 - 혹은 컷 - 를 들고 쫓아간다. 그 대답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작품을 집어들고 광기에 찬 조커부터 우울한 소시민이었던 과거의 무명배우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삶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정의의 인물들의 어느부분에서 그것이 있는지, 혹은 어느 부분에서 그런 '광기의 결여'가 정의와 닮았는지를 볼런드의 화려하고 극단적인 그래픽 속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글루스 가든 - 리뷰를 씁시다.(애니&만화책&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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